“우리 영어교육이 불만족스러운 실제 이유”

<교육 클리닉의 문제: 정보 비대칭성>


운동하다가 갑자기 어깨가 아파서 근처에 있는 개인 병원에 갔는데 어깨와 관계없는 혈액 검사와 소변 검사만 몇 주 동안 하면서 정확한 진단명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또한, 아픈 곳과 관계없는 치료와 처방만 남발해서 몇 달을 다녀도 별 진척이 없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답답해서 병명을 물어볼 때마다 “몸이 매우 안 좋은 상태”라는 모호한 말만 반복하고 “여기는 연예인도 다니는 인기 있는 병원이다”라고 하면서 권위에만 호소한다면 우리는 불쾌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쾌의 원인은 의사만이 상품 정보를 독점하고 있고 정작 소비자인 나는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즉, 정보 비대칭성(information asymmetry)’ 때문입니다. 정보가 부족하기에 불합리한 선택을 한 것 같은 불안감도 계속됩니다. 그러다 설상가상으로 그 클리닉이 사실은 면허가 없는 가짜 의사가 운영하는 곳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떨까요? 우리의 불쾌와 불안감은 좌절과 분노로 바뀔 것입니다.



왜 우리 영어교육은 이렇게도 불쾌한가?”우리나라의 교육 서비스가 바로 위와 같은 답답한 클리닉을 연상하게 합니다. 정보 비대칭성에서 오는 불쾌/불안/좌절/분노가 우리나라의 교육 시장에서 소비자들이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손톱깎이 하나를 살 때도 인터넷에서 상품평을 보고 성능과 가격을 따지는 시대인데 교육 시장만은 여전히 정보 얻기가 막막하고 불편한, 소비자가 무엇을 어디까지 요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답답한 시장입니다.

“정보 비대칭성의 근본 원인은?”

<클리닉인데 진단과 처방이 안 되기 때문이다>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학교/학원/과외는 일종의 클리닉입니다. 우리는 영어 성적이 낮거나 영어 활용이 안 되는 문제(병)를 고치기 위해 학교/학원/과외를 찾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학교를 성적을 평가하는 기관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학교에서 개인에게 맞춰지는 심도 있는 학습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사실, 한 학급에도 수준 차이가 천차만별인 최소 스무 명 이상의 학습자들이 섞여 있기에 학습자 개개인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이를 보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학교에서 제대로 된 진단이나 처방/치료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학원/과외도 실제 속사정은 비슷합니다. 우선 학습자에게 맞는 학원/과외를 고르는 것 자체가 큰 좌절을 주는 복불복의 게임입니다. ‘공부 잘하는 A가 그 학원에 다닌다’ 정도의 막연한 정보가 소비자가 얻을 수 있는 전부이고 그 학원/과외가 내 아이에게도 맞을까 혹은 정말 확실한 솔루션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성적/등급’이 아닌 ‘학습에서의 약점 부분과 그것에 대한 해법’을 알고 싶은데 ‘문법은 약하지만 독해가 강하다’라든지 ‘내신 성적은 잘 안 나오지만, 모의고사 등급은 높다’ 등의 기대감과 열등감을 동시에 자극하는 모호한 이야기만 난무합니다.



우리가 교육 서비스에서 기대하는 것은 명확한 진단과 처방이지만 우리가 받게 되는 것은 모호한 성적과 등급입니다. 이건 마치 어깨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어깨 이야기는 없고 “당신의 몸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으니 다른 곳에서 치료하라”라고 하거나 “몸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으니 확신은 없지만 다양한 치료를 하면서 실험해보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확실한 진단이 되지 않으면 치료는 불가능합니다또한학습자는 실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클리닉에서 기대하는 것은 ‘몸이 안 좋다’와 같은 애매한 이야기가 아니라 “X-ray/초음파의 분석 결과로 질병분류기호 M75.0인 어깨의 유착성 관절낭염으로 판명되었고 주사/물리치료뿐만 아니라 스트레칭/도수치료가 필요하다”와 같은 명확한 진단/처방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육 클리닉에서 기대하는 것은 ‘문법이 약하다’와 같은 ‘애매한 이야기’가 아니라 전체 문법의 과정에서 어느 부분이 약하고 어떤 단계에서 학습이 멈추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진단어떤 과정을 밟아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처방입니다. 가령, ‘네 가지 절 중에서 관계절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중 특히 THAT절이 약하다’와 같은 약점 파악이 되면 문장패턴 → 부사/전치사구 결합 → 4가지 절 개념 → 관계절 결합 → THAT절 → gap 찾기의 순서로 기반부터 약점까지의 단계별 점검/훈련이 이루어질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확실한 진단이 나오지 않으면 어디에서 학습이 멈추었는가(frozen spot)를 찾아낼 수 없고 단계적인 치료도 불가능합니다. 우리나라 영어교육이 불쾌한 가장 큰 이유는 학교/학원/과외의 그 어디에서도 소비자가 수긍할만한 진단/처방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육 내적인 문제: 진단이 안 되는 이유는?”

<질병분류진단표가 없기 때문이다!>

현대의학은 CT나 MRI 같은 영상진단이 발달하고 심지어 인공지능(AI)까지 도입되면서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해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 발달보다 몇 배나 더 중요한 현대의학의 진정한 혁명은 전 세계 모든 의료진이 동일한 진단 매뉴얼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현대의학은 1893년부터 시작되어 11차까지 개정된 국제질병분류(ICD)를 진단 매뉴얼로 삼고 있습니다. 전 세계 모든 의료진이 같은 병명/코드의 진단을 내리고 임상과 연구 결과가 끊임없이 진단 매뉴얼에 반영된다는 것이 의료 서비스에 객관성과 신뢰를 줍니다.

 

가령, 그냥 ‘어깨가 안 좋다’가 아니라 어깨 관절을 감싸는 막과 주변 조직이 염증 때문에 들러붙어 버린 것(유착성 관절낭염)인지 어깨를 회전시키는 근육이 찢어지거나 파열된 것(회전근개 증후군)인지 어깨를 회전시키는 근육의 힘줄에 석회성 물질이 쌓인 것(석회성 힘줄염)인지를 M75.0 혹은 M75.1 혹은 M75.3으로 각각 다른 병명/코드로 구분합니다. 진단이 다르기에 처방과 치료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국제질병분류(ICD)와 같은 질병 분류 체계가 없다면 우리는 의학의 객관성을 신뢰할 수 없고, 심지어 진짜 의사와 가짜 의사를 구분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국제질병분류(ICD)와 같은 체계적인 진단 분류표가 없다는 점입니다. 즉, 영어교육 클리닉은 콘텐츠 → 진단 → 처방의 3단계에서 1단계에 해당하는 조직적인 콘텐츠(분류표)가 없기에 2단계의 진단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우리 영어교육에서 쓰고 있는 분류표는 100년도 더 된 일본식 문법인데 이것은 현대언어학이 발달하기 전에 만들어진 허술하고 비조직적인 틀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현대언어학의 핵심인 구(phrase)와 절(clause)에 대한 체계가 아예 없기에 이는 언어학적으로는 ‘문법(grammar)’ 혹은 구조(structure)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문장(sentence)뿐만 아니라 문장을 결합해서 만드는 단락(paragraph)까지가 문법의 범주여야 하는데 그 적용 범위가 너무 좁습니다. 즉, 품사도 체계를 갖추지 못한 수준이고 구(phrase)/(clause)과 단락(paragraph)까지 나가지 못했기에 분류표라고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조잡한 수준입니다.

 

수학이나 과학이나 사회과목은 영어와 사정이 다릅니다. 가령, 처음 수학을 가르칠 때 ‘적분’부터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적분’을 모른다는 진단이 내려지면 ‘미분’이 가능한지를 점검할 것이고, ‘미분’을 모른다면 ‘함수’ 개념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하지만 영어는 왜 ‘부정사’부터 출발하면 안 되는지 혹은 왜 ‘전치사’를 마지막에 가르치면 안 되는지를 제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특정 문법 부분이 약하다면 어떤 단계를 밟아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모릅니다. 이처럼 확실한 분류 매뉴얼 혹은 전체 지도(map)가 없기에 영어는 특별한 공부 방법이 없는 과목 혹은 아무나 가르칠 수 있는 과목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보 비대칭성에서 오는 불쾌/불안/좌절/분노가 우리나라의 교육 시장에서 소비자들이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또한, 학교/학원/과외의 그 어떤 교육 서비스에서도 수긍할만한 진단/처방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나라 영어교육이 소비자에게 불쾌한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리고 진단이 안 되는 근본 원인은 ‘콘텐츠 → 진단 → 처방’의 3단계에서 진단의 기반이 되는 1단계의 조직적 콘텐츠가 없기 때문입니다. 병의 진단을 위해서는 인간이 걸릴 수 있는 모든 질병을 큰 카테고리와 작은 카테고리로 모두 구분해야 하는 것처럼 영어 문장과 단락을 생성하지 못하는 이유를 진단하기 위해서는 이 순서를 따라가면 아무리 복잡한 문장과 단락도 만들 수 있는 단계별/조직적 체계가 필요합니다. 이 조직적 콘텐츠를 갖추지 못한 것이 우리나라 영어교육이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 문제/내적인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