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의 영어는 쌓이지 않을까?”

<10년을 해도 영어는 늘지 않는다>



“왜 영어는 쌓이는 느낌이 없을까?” 대한민국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 뜻과 관계없이 오랜 기간 영어를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이런 의문을 한번은 던져 보았을 것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내신시험과 수능 영어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이고 대학에 들어가면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TOEIC이나 공무원시험에 매달립니다. 하지만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까지 무려 10년 이상을 학습했지만 이상하게도 영어 실력은 늘 제자리를 맴돌고 일정 단계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독해는 되는데 문법이 약하다”라든지 “듣기는 되는데 영작이 안 된다”라든지 “말하기는 되는데 원서 읽기가 안 된다” 등의 ‘문법/영작/듣기/말하기/읽기’가 전부 따로 노는 반쪽 영어로 끝이 납니다. 


결국 영어는 우리 모두의 한(恨)이 되어서 어느 순간 “왜 난 안되지?” 하면서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들면 그때부터 온갖 영어 공부법을 순례하게 됩니다. 제일 기초적인 문법책이나 회화책부터 다시 시작하기도 하고 넷플릭스에서 대본을 받아서 따라 읽기를 하기도 하지만 끈기 있게 끌고 나가기가 어렵고 뭔가 헛도는 기분이 계속됩니다. 무엇보다 쌓이는 느낌, 공부가 늘고 있다는 느낌,  영어 데이터가 축적되고 있다는 느낌, 이것이 생기지 않습니다. 

“반쪽영어: 죽은 편지(dead letters)”

<문법/영작/듣기/말하기/읽기가 전부 따로 논다>

영어 데이터가 축적되지 않는 이유, 우리의 영어가 이런 반쪽 영어의 덫에 걸려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어는 분명 하나의 언어인데 문법/영작/듣기/말하기/읽기가 따로 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지학에서는 인간의 모든 학습이나 장기 기억은 습득(acquisition)→강화(consolidation)→인출(retrieval)의 3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마치 우체국으로 들어오는 편지들이 받을 사람의 주소에 맞추어 분류되듯이 학습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는 머릿속 분류함에 나누어져야 합니다(습득: acquisition). 이후 같은 분류 작업이 반복되면서 정보의 양과 축적되는 속도가 증가하게 되고 마침내 그 분류함은 충분한 편지들로 꽉 차게 됩니다(강화: consolidation). 학습의 최종 단계인 응용은 이 분류함에서 필요한 정보를 몇 개씩 동시에 꺼낼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인출: retrieval).


영어 학습도 위의 일반적인 학습/장기 기억과 똑같은 과정을 거칩니다. 어떤 데이터가 습득되고 축적되려면 정보의 조직화(organization)가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즉, 영어 데이터가 쌓이려면 들어올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분류해서 쌓을 수 있을 정보의 분류함이 먼저 머릿속에 만들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영어가 쌓이지 않고 반쪽에 머물렀던 이유는 죽은 편지들(dead letters), 즉, 수취인 불명의 편지들(dead letters) 때문입니다. 머릿속에 분류함이 만들어져 있지 않은 경우에는 들어오는 데이터들은 들어갈 분류함이 없기에 모두 버려지고 죽어버립니다.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영어 공부를 하고도 정보가 쌓이지 않았던 이유는 머릿속에 조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정보를 체계적으로 쌓을 수 있는 분류함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분류함 자체가 없었기에 데이터가 쌓이지 않았고(acquisition→consolidation) 막상 응용(retrieval)을 해야 하거나 시험을 치려고 하면 꺼내올 정보가 없었던 것입니다.

“양(量)에 대한 환상: 하지만 정말 많이 노력한다면?”

<(1)한국어 퍼즐게임, (2)콘텐츠 자체의 결함>


하지만 정말 많은 양(量)의 공부를 한다면 저절로 이 조직화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요? 즉, 영어 공부를 쉬지 않고 열심히 한다면 자동으로 머릿속에 정보의 분류함이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영어 공부법을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밤에 잘 때도 드라마를 틀어두라” 혹은 “일정한 임계치(臨界値)만 넘으면 갑자기 영어가 되기 시작한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이 양(量)에 대한 우리의 환상입니다. 여기에는 2가지 근본 문제 혹은 함정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우리가 하고 있는 공부가 영어 공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가 해왔던 시험 영어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습니다. 영어를 배우는 목적은 의사소통이고, 구체적으로는 문장(sentence)단락(paragraph)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험 영어는 문장/단락을 만들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대충 단어를 조합해서 ‘해석’해보고 답을 맞히면 넘어가는 고질적인 버릇이 우리에게 길러졌습니다.

아무리 많은 양(量)의 공부를 해도 분류함을 만들지 못하는 또 하나의 근본적인 이유는 조직적인 콘텐츠와 학습설계의 부재(不在)에 있습니다. 즉, 영어 분류함을 만들 수 있는 논리 체계 자체가 현재 우리 영어 교육에 없다는 점입니다. 지금 우리 교육에서 채택하고 있는 분류함은 100년도 더 된 일본식 체계인데 이것은 문장을 만들거나 단락을 짤 수 있는 이론이 아닙니다. 즉, 지금의 분류함에는 꽂을 수 있는 편지가 얼마 되지 않고 그나마도 어디에 꽂아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습니다.


가령 우리는 '8품사'를 배웠지만 the sleeping child(그 자고 있는 아이)나 my music teacher’s mother(나의 음악 선생님의 어머니)이나 a number of invited guests(많은 초대받은 손님들)과 같은 간단한 구조도 어떻게 품사적으로 분류해야 할지를 모릅니다(위의 밑줄을 그은 말들은 모두 8품사에 속하지 않습니다).

 

He was going there. 그는 그곳에 가고 있는 중이다.
He wanted to go there. 그는 그곳에 가기를 바랐다(가고 싶었다).
He used to go there. 그는 그곳에 가곤 했다(지금은 가지 않는다).
He was going to go there. 그는 그곳에 갈 예정이었다.
He was ready to go there. 그는 그곳에 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He was unable to go there. 그는 그곳에 갈 수가 없었다.
He was likely to go there. 그는 그곳에 갈 것 같았다.
He was sure to go there. 그는 그곳에 갈 것이 확실했다.
He was sure of going there. 그는 그곳에 갈 것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He was forced to go there. 그는 그곳에 가도록 강요를 받았다.
He was expected to go there. 그는 그곳에 갈 거라고 예상되었다. 


우리는 모두 ‘문장의 5형식’이라는 것을 어릴 때부터 배웠지만 위와 같은 간단한 문장들도 어떻게 5형식에 맞추어 분류해야 할지 모릅니다. 제대로 분류가 안 되면 이들을 모두 ‘숙어(익숙해진 말)’라고 하면서 무조건 외우게 하는데 곧 대부분의 내용이 그냥 외워야 할 숙어로 바뀌고 맙니다. 즉, ‘문법=암기’가 됩니다(위의 밑줄을 그은 말들은 모두 ‘숙어’라고 하면서 우리가 외우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냥 외우는 것으로는 분류함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명확하게 분류되지 않는다면 그 정보는 쌓이지 않습니다. 습득(acquisition)→강화(consolidation)→인출(retrieval)의 학습 3단계에서 분류함 자체가 허술하거나 없다면 1단계인 습득(acquisition)부터 안 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임계치를 넘으면 영어가 되기 시작한다”라는 말에 혹하면 안 됩니다. 임계치라는 말은 정보의 분류함이 만들어지고 난 뒤에 정보가 제대로 쌓이는 2단계의 강화(consolidation)를 뜻합니다. 정보의 분류함 자체가 쓸만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미 형성되어 있는 한국어 틀에다 영어를 끼워 맞추기 시작했고 이것이 한국어 퍼즐게임이 시작된 이유입니다. 즉, 한국어 퍼즐게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영어 분류함 자체가 조직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