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박상준입니다”

<영어라는 언어를 냅킨 한 장에 설명해 주고 싶습니다>

And mark in every face I meet
Marks of weakness, marks of woe.

그리고 나는 모두의 얼굴에서 자국과 마주한다,
쇠약함의 자국들을, 비통의 자국들을.

― ‘London’ 中, William Blake― 


이제는 27년도 더 된 일이지만 마치 어제처럼 생생한, 낡은 소파가 있던 대학 과방의 어느 늦은 오후가 생각납니다. 복학생쯤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쭈뼛쭈뼛 무슨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어색한 표정으로 들어와서는 영어라는 언어를 한 페이지로 설명해 달라는 뜬금없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사법시험 때문에 영어를 다시 공부하게 된 법대생이라고 소개했고, 중고등학교 때에 영어를 정말 열심히 공부했지만 파고들수록 영어는 예외투성이인 데다 근본적으로 어떤 언어인지 실체가 잡히지 않아 정말 답답했다고 말했습니다. 최근 다시 영어 공부를 하게 되면서 그 답답함이 재발했고 이제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실례를 무릅쓴 거라고 했습니다. 영문학과에 오면 뭔가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돌아보면 참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사이 AI가 스스로 학습을 통해 세계 바둑을 제패했고, 블랙홀을 실제로 관측했으며,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합하려는 11차원의 이론들이 본격화되었고, 1초에 20경 번의 연산을 수행하는 슈퍼컴퓨터 summit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의 영어 콘텐츠와 교수법은 18세기의 8품사와 문장이 조금만 길어지면 써먹을 수 없는 5형식에 멈추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긴 시간이 흘렀지만 오후 때만 되면 어김없이 그 법대생은 매번 요란한 변장을 하고 쭈뼛쭈뼛 우리의 연구실 문을 다시 노크합니다. 오늘도 그는 혹은 그녀는 정말 어릴 때부터 영어를 배웠고 또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별 방법을 다 시도했지만, 여전히 영어가 괴물 같이 여겨진다고 불평합니다. 조금도 실용적이지 않은 문법을 위한 문법에 지치고 현지인도 풀지 못하는 시험을 위한 시험에 화가 나지만, 이 징그러운 괴물에게서 벗어날 길이 없노라고 하소연합니다. 27 년 전의 그 답답하다는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이론과 실제의 괴리, 그것이 주는 답답함 그리고 비효율성의 문제를 현대언어학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누구나 수영의 영법(泳法)을 단계별로 배우면 물에 뜰 수 있고, 훈련을 통해 배영도 평영도 익힐 수 있듯이 현대언어학의 설명력과 논리를 이용해 수영의 영법과 같은 체계적인 훈련 과정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언어학은 너무나 전문적이고 방대해서 그중 어떤 것을 선취해서 우리 한국인에게 가장 필요한 훈련의 단계를 정할 것인지는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정작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언어학에서는 턱없이 자료가 부족하기도 했고, 어떻게 이론들을 연결하고 통합적인 체계로 완결할까는 전혀 다른 도전적인 문제였습니다. 또한, 무엇보다 이론/훈련의 분량과 강도를 정하고 그것의 단기적/장기적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실험의 장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이 이론을 만들고 수정하고 실험을 통해 연습 강도를 조절하고 더 간명한 방법론을 만드는 것에 완전히 매료당했고 깊이 빠져버렸습니다. 제가 썼던 해석이론은 이러한 현장 실험의 15년 결과물이었고, 지금 내어놓은 문장기호는 해석이론의 무거움을 극복하려고 했던 또 다른 12년간의 결과물입니다. ‘해석이론’으로 뜻을 같이했던 많은 분이 이 엄청난 희생을 강요했던 ‘문장기호’ 실험에 지난 9년간 같이 해주었고, 저 역시 그간 일주일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이 프로젝트에만 매달렸습니다.


“영어로 고통받는 현실이 사라지기를 소원합니다”

<영어도 수영이나 춤을 배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부디 이 문장기호5와 독해4분면 시리즈를 통해 지난 27년간 저를 괴롭혔던 수많은 오후의 법대생들이 더는 저를 찾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부디 우리나라의 중고등 학생들이 이 책과 훈련을 통해 수영이나 춤을 배우듯이 체계적으로 영어 리듬을 익히고 이를 통해 탄탄한 언어 기반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온갖 스트레스로 가득한 중고등학교 시간을 오히려 영어 데이터를 제대로 쌓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로 바꿀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부디 이 5개의 정글칼이 강력한 무기가 되어 문법을 위한 문법과 시험을 위한 시험과 작은 고시원 방에 갇힌 우리나라의 청년들이 자신을 둘러싼 영어 정글을 멋지게 헤쳐나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이 책이, 저의 오랜 이기적인 실험 때문에 많은 고통을 입었던 제 가족과 지금도 같이 밤을 새우고 있는 동료들, 그리고 저를 인내하면서 상처를 입었을 많은 분과 오랫동안 기다려주셨던 독자분들께 작은 보상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문장기호 ‘이론편’ 후기).

“장미의 탓이 아니다”

<잘못은 학습자가 아니라 프로그램에 있다>

땅속에 장미 씨앗을 심을 때,
우리는 그것이 작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뿌리가 없고 줄기가 없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씨앗에 필요한 물과 영양분을 주면서
그것을 장미꽃이 아닌 씨앗으로 대한다.
처음 땅에서 장미 싹이 텄을 때,
우리는 그를 ‘미숙하고 덜 발달했다’고 탓하지 않으며
또한 꽃봉오리를 맺었을 때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하며 그를 책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과정 하나하나가 진행되는 것에 감탄하며
장미의 발달 단계마다
그것이 필요로 하는 돌봄을 제공할 것이다.
장미는 꽃을 피울 때뿐만 아니라
씨앗일 때부터 장미였다
.
그것은 자신 안에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항상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계속 변화하는 과정에 있고,
매 단계, 매 순간, 그것은 있는 그대로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하다. 

[W. Timothy Gallwey]